수백 년 전 세상에서 사라진 존재를 마치 우리 눈앞에서 살아 숨 쉬고 손을 대면 따뜻한 온기가 느껴질 듯 생생하게 그려낸 두 화가의 놀라운 경지를 두고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구태여 난도를 따지자면 토끼 쪽이 더 어려웠을 것이다. 토끼가 초상화를 그려달라며 자세를 잡고 가만히 앉아 있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 토끼를 면밀히 관찰해 생김새와 움직임을 다각도로 파악하며 많은 스케치를 하고 죽은 토끼를 앞에 두고 세부를 완성했을 것이다.
토끼 한 마리가 앉아 있다. 큰 두 귀를 세우고 앞발을 모은 채 쫑긋이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토끼를 보는 이쪽도 집중하기는 마찬가지다. 앉아 있는 토끼 그림이 너무나 사실적이라 실제로 살아 있는 토끼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기 때문이다.
인간계에 모나리자가 있다면 동물계에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토끼가 있다.
모나라자와 토끼를 비교해 보면 르네상스 회화의 혁신을 이끌었던 두 천재 예술가가 거의 동시에 완성한 두 작품은 공개된 이래 보는 이들 모두의 찬탄을 받으며 수많은 복제물을 양산해 왔다.
뒤러는 왼쪽 위에서 내려오는 빛이 토끼털의 결에 따라 이리저리 반사되는 효과까지 터럭 하나 놓치지 않고 정밀하고 선명하게 그려냈다. 토끼 한 마리 그림인데도 오래도록 들여다보게 되는데 이는 물론 실제라기보다는 사실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뒤러의 하이퍼 리얼리즘 기법이다.
이것은 그림인가, 사진인가, 아니면 실물인가? 종이 위에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심리적으로 되묻게 된다. 완벽히 재현된 토끼의 실루엣, 채도와 명도를 조절하며 섬세하게 표현된 토끼의 털 색깔, 토끼 몸체 부분에 따라 달라지는 선명한 붓질,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화가의 손길은 거의 카메라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 번이라도 그림을 그려 본 사람이라면 이 토끼를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인내심이 필요한지 알 것이다. 수채 물감을 사용해 종이 위에 이런 수준으로 토끼털을 묘사하려면 매번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려 적절한 시간에 한 올 한 올 정확히 그려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토끼 앞가슴의 부드러운 털과 등 위 하얀 털의 표현은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예술가의 손길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중세 시대 북유럽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러한 작품을 수 없이 남겼다. 그림, 드로잉, 판화 작품들을 보면 도대체 57세에 세상을 떠난 화가가 어떻게 그 방대한 양을 남길 수 있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손으로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극사실적인 토끼 그림을 보면서 시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한없이 몰입하여 종이 위에 토끼 한 마리를 완벽히 재현한 화가의 인내의 시간과 몇 초 내지 몇 분 동안 잠깐 그 이미지를 소비하는 현대인의 디지털 시간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멀고 크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재료 특성상 훼손 위험이 커서 거의 전시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어쩌면 사실은 그림을 꺼내두면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나가 버릴까 봐 꽁꽁 싸두는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