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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 _ 프란시스코 고야

by 여행꾼쭈 2023. 8. 20.

거인 _ 프란시스코 고야

 

진격의 거인으로 묘사되어 있는 잔인한 공포의 대표 아이콘인 현대 시대의 거인과는 달리 고야의 거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인간적이다. 괴기스러운 모습과 더불어 문명과 단절된 채로 스스로를 이끌어왔을 것 같은 덥수룩한 수염이 있는 거인의 존재는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되는 마음인 측은함이 거인의 몸에서 흘러나온다. 이 거인은 분명 겁을 먹고 있다. 거인의 훌륭한 사냥터가 될 수 있는 그의 등 뒤에 있는 존재들은 이미 황량하다. 그러면서 거인은 그곳에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마치 이들을 필사적으로 지켜내고 있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며 거인은 절박하다. 그림의 거인을 나폴레옹이라 평가하는 몇몇 이의 의견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고야의 개인적인 욕망으로 바라볼 때의 거인은 나폴레옹의 군대에 홀로 맞설 수 있는 총체적인 존재, 그가 그려내는 스페인의 수호신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한 거인이 아닌 모든 파괴에 대해 방어하기 위한 돌연변이적인 존재이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이다.

눈을 감고 있기에 모든 것이 공포가 된다.

혹은 모든 것이 공포가 되기 때문에 눈을 감고 있다.

 

고야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추론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제 하지 않아도 여전히 실재한다는 것이 아닐까. 태어난 순간부터 시력을 잃고 태어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철저하게 시각적 텍스트에 의존해야 하는 귀신의 존재는 감각을 박탈당한 이들에게는 체험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또한 여전히 공포와 같은 감정은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 실제 우리 눈에 보이며 공포감을 환기시키는 사물 자체는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신화 속의 타이탄 아틀라스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거대한 인물이 멀리 도망치는 사람들과 함께 황량한 풍경을 걸어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스페인의 정치적, 사회적 격변에 대한 논평이자 고야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고야는 흔히 옷 입은 마야, 옷 벗은 마야 등 에로틱한 여인의 초상화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근대 스페인의 정치적 격동기에 예술가로서의 양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그림을 통해 자신의 성찰과 고뇌를 나타낸 행동하는 화가였다.

 

고야는 스페인 왕가의 궁정화가로서 출발했다. 밝고 경쾌한 화풍으로 후기 로코코 시대 왕조의 화려함과 권위를 잘 표현해 왕가의 총애를 받았다. 화려한 화면의 밑바닥에는 덧없는 환락과 위선에 대한 환멸이 깔려 있었고 자연적으로 그의 그림은 정치 사회적 고발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고야 작품 세계의 전환점이 된 동기는 여행 중에 얻은 중병의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게 된 것과 나폴레옹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인한 민족의식의 발로였다. 점점 귀가 안 들리게 되면서 고야는 내면으로 참담했고 그림은 어둡고 암담하다 못해 괴기스러운 분위기로 흘러가게 되었다.

 

어두운 밤의 세계를 그린 그림 속에는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붓질과 선명하지만 우울한 느낌의 색채, 상상력을 동원한 이미지 등 고야 그림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먹구름과 폭풍이 몰아치는 들판에 거대한 거인이 왼쪽을 향해 주먹을 쥐고 서 있다. 그 밑에는 마차와 수레를 몰고 사방으로 몰려가고 있는 인간과 동물의 군상이 펼쳐져 있다.

 

그림의 배경이 된 사건은 나폴레옹의 침입이었다. 스페인의 국민 정신이 거대한 거인처럼 일어나 돌격해 오는 프랑스 적을 향해 저항한다는 의미라고 일반적으로 해석한다. 벌거벗은 원시인처럼 묘사된 거인이 거대한 자연마저 압도하고 땅에 붙어 기어 오는 적을 다 밟아 버릴 것이라는 의미가 서려있는 거의 주술적인 이미지이다.

 

예술가로서 고야가 조국의 정치적 상황과 난관에 봉착해 참여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그림으로 자신의 양심과 견해를 피력하는 방법뿐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좌절을 경험하며 서서히 내면의 세계로 침몰해 갔다. 그림 속의 거인은 현실 세계 속의 적과 맞서는 동시에 정신 속의 악마와 싸우는 인간 의지의 표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 후 고야는 청력을 완전히 잃고 귀머거리의 집이란 이름이 붙은 은둔 저택에서 검은 그림이란 시리즈의 기괴하고 신비한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프랑스에서 여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