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제색도 _ 진경산수화의 걸작 겸재 정선
지루한 장맛비가 그쳤다. 물안개가 피어올라 계곡과의 연장선이 끊어진 산봉우리는 마치 이승이 아닌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웅장한 바위와 소나무가 절경을 이룬 가운데 신선과 이웃으로 지내는가 싶은 집 한 채가 보인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것은 산 정상인 치마바위에 위아래로 시커멓게 칠해진 붓질이다. 부벽준(도끼로 나무를 쪼갰을 때 나타나는 거친 줄무늬)인데 정선는 크고 거친 붓질로 수차례 덧칠함으로써 치마바위의 벽면을 어둡고 무겁게 표현했다. 전통 그림에서 좀처럼 보기 엄청난 크기도 보는 이를 압도한다.
태어나 철들고 느긋한 노년을 맞이하기까지 종로를 터전으로 살아온
서울토박이 겸재 정선의 자부심이 되어 준 인왕산.
저기 아래쪽 기와집엔 그의 오랜 지기가 살고 있다. 사천 이병연의 집이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누구보다 정선의 그림을 좋아하던 친구.
뼛속까지 내 편인 그가 지금 와병 중이다.
빨리 털고 일어나 시 한 수 읊으며 동네 한 바퀴 함께 어슬렁거리면 얼마나 좋을까.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를 보통 '삼원삼재'라고 한다.
'원'자 호를 쓰는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재'자 호를 쓰는 겸재 정 선, 현재 심사정, 공재 윤두서다.
겸재는 사대부 출신으로 중인이 아니었지만 그림 재주가 뛰어나 도화서 화원으로 추천받아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뜻이 통하는 문인들과 어울리며 점차 자신의 예술세계를 넓혀 나갔다. 그는 그림을 좋아해서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한편으론 여행을 좋아해서 명승지를 찾으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봉우리 주변에서 세차게 흘러내리는 세 개의 폭포 줄기가 있다.
비가 그친 그날 오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목이 말해주듯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의 제색(霽色)은 '비가 개어 색이 드러난다'는 뜻으로 비 온 뒤 개어가는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젖어있지만 겸재 특유의 힘찬 먹선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 바위는 그가 그토록 바라던 건강을 회복한 친구의 모습이 아닐까. 사천이 시를 써 보내면 겸재가 그림으로 화답하고 겸재가 그림을 보내면 사천이 시로 응수하며 서로의 감정을 교류했다. 서로가 서로의 소울메이트였던 것이다. 그런 소중한 벗이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으매 전전긍긍했을 겸재의 심사가 그대로 그림에 녹아 있다. 비 갠 산의 모습을 빠르게 화폭에 담기 위해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덧칠하는 바람에 암벽과 소나무의 잎 부분에 먹물 뭉친 자국이 군데군데 보일 정도로 화가의 간절함과 초조함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 시화에 나오는 풍경이나 작가의 이상향을 그린 '관념산수화'가 주를 이뤘지만, 후기에는 겸재에 의해 우리의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가 꽃을 피우며 민족의 자부심을 끌어올렸다.. 진경산수화는 실재의 경치를 그리되 단순한 재현이 아닌 작가의 느낌과 생각을 집어넣어 회화적 재구성으로 탄생한 우리만의 산수화 장르다.
인왕산은 원래 산 전체가 백색의 화강암으로 이뤄진 암산으로, 바위를 흰색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겸재는 진한 먹색으로 힘차게 내려 긋기를 반복하며, 강렬한 농담의 대조를 통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76세의 겸재가 그린 <인왕제색도>는 그의 모든 내공이 집약된 진경산수화의 걸작이다.
지루한 장맛비가 그치고 이제 막 물안개가 피어오르며 맑게 개어가는 인왕산의 모습처럼 소중한 벗이 병을 떨치고 일어나길 바랐던 화가의 간절한 바람은 이뤄졌을까. 안타깝게도 그림이 그려진 지 4일 후 겸재의 바람은 허망하게 스러졌다. 이병연이 끝내 세상을 뜬다. 친구가 떠나고 없는 인왕산 자락을 바라보며 겸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 먹먹함을 헤아릴 수 있을까.
세월이 지나 조선 후기를 빛낸 문화계의 두 거장은 갔지만 그림은 세상에 남아 예술을 통해 나눈 진한 우정을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